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가키 가즈시게 (문단 편집) === 전쟁과 패전, 그 이후 === 결국 정치에서 은퇴하고 [[타쿠쇼쿠대학]][* 이름부터 매우 수상한 일본의 [[극우]] 성향 대학으로, 원래 [[대만]] 총독부의 관료 양성을 위해 세워진 교육 기관이 모체다. [[김완섭]]과 함께 전후 양대 [[친일파]]로 절찬리에 병신짓 중인 [[고 젠카]](오선화)가 여기서 [[교수]]질을 하고 있다.] 학장에 취임했다. 군사와 정치에 관한 폭넓은 안목 덕인지, 모두가 일본의 승승장구를 확신하던 [[태평양 전쟁]] 개전 초에도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하고 일본의 앞날에 회의감을 품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이 맡았던 역할을 자신이 맡겠노라' 생각하며 당시 막 남방작전에서 승리한 제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에게 인편으로 일본의 장래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마무라는 '일본군이 무리한 팽창으로 병력이 분산되고 공세한계점에 도달하면 수세에 몰릴 것'이라며 그의 전망에 동의했다. 자신의 조선총독 재임에 대해서 상당히 자부심을 느꼈던 모양인지 조선의 해방과 조선 민중들의 환호에 대해서 전해듣고는 무척이나 분노하면서 "머지않아 비애를 느낄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일본 육군 내부에서 합리적인 인물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합리적 제국주의자였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패전으로 공직에 추방되었으나 공직추방령이 해제된 후에 이루어진 제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53년)에서 전국 최고의 득표수로 의원직 당선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전후에도 정당총재이자 수상 후보로 꼽혔다. 이후 참의원 임기 중, [[1957년]]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전후 [[일본 참의원]] 최고령 의원이었다.[* 현재 참의원에서 최고령은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의원이다.] 그간 조선 총독과 일본 정치인을 여러 번 오간 세월을 생각하면 정말 오래 산 셈이다. 그와 동시기를 살았던 일본 육군의 고위 장성들이나, 육군 출신 총리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을 생각해보면, 도조와 고이소의 방해 때문에 총리가 되지 못한 가즈시게야말로 최후의 승리자였던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